2025년, 한국 사회는 디지털 범죄와의 싸움에서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했다. 한때 ‘철옹성’이라 불리며 각종 범죄의 온상이었던 텔레그램이, 마침내 국내 수사기관의 압수수색 영장과 수사협조 요청에 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플랫폼 정책 변화가 아닌, 수사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의미한다. 텔레그램의 수사 협조가 갖는 의미와 그 배경,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직면할 과제들을 짚어본다.
텔레그램, 왜 범죄의 온상이었나
텔레그램은 그간 고도의 암호화 기술과 익명성, 해외 서버라는 특성 덕분에 사이버 범죄자들의 ‘성역’처럼 여겨져 왔다. 특히 2020년 ‘박사방’ 사건을 기점으로, 텔레그램은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제작, 유포, 불법촬영물 거래, 성적 협박 등 디지털 성범죄의 핵심 플랫폼으로 악명을 떨쳤다.

당시 수사기관은 수차례 텔레그램 측에 수사협조를 요청했지만, 2020년 박사방 수사 당시에도 한국 경찰의 7차례 요청이 모두 거절되었다. 범죄자들 사이에서는 “텔레그램만 쓰면 절대 안 잡힌다”는 인식이 퍼졌고, 이는 수사기관에 대한 조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수사 패러다임 전환, 첫 협조의 배경과 계기
변화의 단초는 2024년 하반기, 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의 프랑스 체포 사건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텔레그램이 아동 성착취물 유포, 마약 밀매, 테러 모의 등 다양한 범죄의 통로가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사 협조를 하지 않는 점을 문제 삼아 두로프를 체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두로프는 “적법한 요청에 대해서는 불법행위에 연루된 사용자의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입장을 바꿨고, 그 결과물이 바로 2024년 9월, 서울경찰청의 압수수색 영장에 텔레그램이 협조한 첫 사례다.
경찰은 ‘자경단’이라는 성착취 조직의 수사를 위해 압수수색 영장을 이메일로 텔레그램 측에 전달했고, 텔레그램은 같은 달 9월 24일, 관련 사용자 정보와 로그 기록 등을 제공했다. 이는 텔레그램이 한국 수사기관과 처음으로 실질적 공조에 나선 사건으로 기록됐다.
‘자경단’ 사건, 텔레그램 협조의 성과
‘자경단’은 2020년부터 약 4년 8개월간 활동하며, 총 234명의 피해자(그중 미성년자 159명 포함)를 상대로 성착취물을 제작하고 유포하며 협박, 심리적 조종, 성폭행 등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이 사건은 피해 규모만 따지면 ‘박사방’ 사건의 3배 이상으로 평가된다.
텔레그램의 수사협조는 이 사건 수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경찰은 총책 ‘목사’를 포함한 조직원 14명을 검거하고, 딥페이크 영상 유포자 40명을 추가로 붙잡았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200회에 가까운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했으며, 텔레그램과는 하루 평균 3회 이상 자료 요청 및 회신이 오갈 정도로 긴밀하게 공조했다.
특히, 텔레그램은 사용자들의 가입 전화번호, 로그인 IP 주소 등 피의자 식별에 필수적인 정보를 제공했으며, 이는 직접적인 검거와 범행 추적에 유용하게 활용됐다.
수사협조의 범위와 한계
텔레그램은 2023년 9월 약관과 개인정보보호정책을 개정해, 미국·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 국가의 적법한 요청에 수사협조를 하기로 방침을 전환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수준이다. 페이스북이나 X(구 트위터)에 비하면 제공되는 정보의 범위가 여전히 좁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범죄자들은 텔레그램의 협조 가능성을 인지하고 VPN, 대포폰, 암호화폐 기반 채팅방, 자폭형 대화방 등 다양한 기술적 수단으로 추적을 회피하고 있다. 수사기관이 텔레그램만으로 완벽한 추적을 하기에는 여전히 구조적인 한계가 있다.
‘텔레그램 엑소더스’, 시그널 등으로 이동하는 범죄자들
이러한 변화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바로 범죄자들의 플랫폼 이동, 일명 ‘텔레그램 엑소더스’ 현상이다. 텔레그램이 더 이상 절대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이들은 시그널(Signal), 심플엑스 챗(SimpleX Chat) 등 더 강력한 암호화 기반의 메신저로 이동하고 있다.
시그널은 서버에도 메시지가 저장되지 않고, 통화까지도 종단간 암호화되는 구조로, 포렌식 기술로도 분석이 어려운 구조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앱들에 대해 국제 공조 체계를 확대하고, 범죄의 공급망 자체를 차단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법제도 변화와 수사 환경의 진화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분노가 커지면서, 국내 법제도도 빠르게 개정되고 있다. 최근에는 딥페이크 성범죄물을 ‘단순 시청’만 해도 처벌할 수 있도록 성폭력처벌법이 강화됐고, 아동·청소년 대상 성착취 협박·강요에 대한 처벌 수위도 크게 올라갔다.
또한, 수사기관이 텔레그램 등 해외 플랫폼에서 위장 잠입 수사를 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이는 실제 수사 실효성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 열쇠가 될 수 있다.
수사 절차와 피의자 대응 전략
현재 텔레그램을 이용한 범죄는 단순한 음란물 유포 수준을 넘어, 범죄단체조직·활동, 청소년성보호법 위반 등 중대 혐의로 처벌된다. 수사기관은 초기부터 압수수색, 신상정보 공개, 디지털포렌식, 심리검사 등 다각도로 압박하며, 영장 청구 및 구속 가능성도 매우 높아졌다.
피의자 입장에서는 수사 초기 단계부터 전문 변호인의 조력을 받아 신속히 대응하고, 심문이나 포렌식에 대한 전략적 준비가 필수다.
전문가 분석 – 새로운 수사 환경, 새로운 도전
텔레그램의 수사협조는 한국 사회의 디지털 치안에 큰 이정표가 된 사건이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범죄자들은 플랫폼을 옮기고, 수법은 더욱 은밀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은 과제를 제시한다.
- 글로벌 플랫폼과의 국제 공조 체계 구축 강화
- 위장 수사 및 침투 수사에 대한 제도적 정비
- VPN·익명화 기술 대응을 위한 기술적 역량 확대
- 시그널·심플엑스 등 대체 앱에 대한 정보 수집 체계 마련
‘텔레그램만 쓰면 안 잡힌다’는 시대는 끝났다.
수사기관은 이제 텔레그램이라는 철옹성의 문을 열었고, 디지털 범죄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나 새로운 플랫폼, 새로운 수법이 이어지는 가운데 디지털 안전망의 강화는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법, 기술, 국제 협력이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수사 시스템을 갖춰야 할 때다. 사이버 공간의 안전은 단순히 경찰의 몫이 아닌, 사회 전체의 집단적 노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