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에서 처럼 백성(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임금과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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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에서 처럼 백성(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임금과 대통령

위기의 순간에 백성을 버린 지도자들

한국 역사에는 위기의 순간에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지도자들의 사례가 여럿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국민에 대한 책임을 저버린 것으로 비판받지만, 당시의 복잡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들은 단순히 한 사람의 결단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배경에는 정치적 상황과 사회적 압력이 함께 얽혀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며, 그 의미와 교훈을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전란에서 처럼 백성(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임금과 대통령
전란에서 처럼 백성(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임금과 대통령

임진왜란 때의 선조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을 갔습니다. 당시 일본군의 기세가 매우 강력했고, 조선군은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급히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선조는 안전을 위해 피난을 선택했지만, 이 과정에서 왕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선조가 의주에 도착했을 때 그를 따르던 신하는 환관과 궁녀, 의관 등을 제외하고 단 17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선조의 피난 과정은 매우 초라했고, 이는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선조실록>에는 당시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벽에 임금이 인정전에 나오니 백관과 인마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이날 종일 비가 쏟아졌다. 임금과 동궁은 말을 타고, 중전은 유옥교를 탔다. 숙의 이하는 홍제원에 이르러 비가 더 세차게 내리자 가마를 버리고 말을 탔다. 궁인들은 모두 통곡을 하면서 도보로 따랐다. 종친과 모시는 문무관은 100명도 되지 않았다. 벽제관에서 점심을 먹었다. 임금과 중전은 겨우 상을 차렸지만 동궁은 반찬도 없었다.”

선조가 서울을 떠나자 백성들의 반응은 격렬했습니다. 궁궐과 관청에 불을 지르고 내탕고의 보물을 약탈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백성들이 가장 먼저 장례원과 형조에 불을 질렀다는 것입니다. 이 두 관청에는 노비 문서가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는 당시 백성들이 느꼈던 억압과 차별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조의 피난은 국가를 지켜야 할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백성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당시의 신분 제도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가 표출된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병자호란 때의 인조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는 한양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청나라의 급작스러운 침입에 대응할 준비가 부족했던 조선은 결국 수도를 지킬 수 없었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1637년 1월 9일, 인조는 청나라의 침입을 피해 한양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란을 떠났습니다.

남한산성에서 45일간의 처절한 항전 끝에 인조는 결국 청나라에 항복하게 됩니다. 1637년 2월 24일, 인조는 삼전도(현재 서울 송파구)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치욕적인 의식을 치렀습니다. 이 의식에서 인조는 삼배구고두의 예를 행했는데, 이는 세 번 절을 하고 절을 할 때마다 세 번 이마를 땅에 찧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과정에서 인조는 왕으로서의 자존심을 철저히 무너뜨려야 했으며, 이 사건은 ‘삼전도의 굴욕’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삼전도의 굴욕’은 1910년 경술국치 이전 한국 역사상 최대의 굴욕으로 여겨집니다. 항복의 대가로 조선은 청의 신하가 되었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후의 효종), 그리고 20만 명의 백성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야 했습니다. 이는 조선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긴 사건이었으며, 이후 조선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은 조선 왕조의 위신을 크게 손상시켰고, 백성들에게는 지도자의 무력함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조선 사회 전반에 걸쳐 강한 자성의 분위기를 불러일으켰으며, 이후 조선의 대외 정책과 군사적 준비 태세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때의 이승만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을 떠나 대전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인해 서울은 빠르게 위기에 처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안전을 위해 대전으로 피난을 결정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오전 1시경 대통령 전용열차를 타고 서울을 떠났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피난은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특히 국민들에게 “서울은 절대로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국민 여러분은 안심하고 정부의 지시를 따라주기 바란다”라고 방송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도망간 것이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국민들은 큰 혼란에 빠졌고, 서울에 남아 있던 많은 사람들은 정부의 피난 소식을 접한 후 급히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강 다리가 급작스럽게 폭파되었고, 이는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을 초래했습니다. 특히 피난 과정에서의 혼란과 한강 다리 폭파는 군사적 판단의 미숙함과 지도자의 부재로 인해 발생한 비극으로 기록됩니다.

이승만의 피난은 당시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지도자가 국민을 지키기보다는 자신의 안전을 먼저 생각한다는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는 이후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 정부의 신뢰도가 급격히 하락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지도자가 보여준 행동은 이후의 정치적 상황과 국민의 의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역사 속에서 위기 상황에 백성을 버린 지도자들의 사례는 국민에 대한 책임을 저버린 것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 군사적 상황과 지도자들이 느꼈던 압박감 또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조, 인조, 그리고 이승만의 사례는 모두 그 시대적 배경 속에서 지도자들이 겪었던 어려움을 반영합니다. 물론 그들의 선택은 백성들에게 큰 실망과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이러한 사